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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2. 13:54

근조, SGI Computing에 관한 독백2009. 4. 2. 13:54

80, 90년 중반 정도에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거나 컴퓨터 업계에 오래 계셨던 분들은 SGI(Silicon Graphics Inc.)라는 회사를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UNIX 기반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의 최강자였던 SGI가 90년대 후반부터 슬슬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만 미국의 기업 회생 프로그램인 chaper 11(파산(bankrupcy)과는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만...제가 이런 건 좀 약해서... 잘 아시는 분은 chapter 11을 쌈빡하게 설명하는 글 좀 써서 트랙백 좀 달아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로 연명한단 말을 들었는데, 급기야  Rackable Systems라는 회사가 인수함으로써 사라졌습니다.

SGI가 컴퓨터 업계에서 끼친 영향은 큽니다. 일단 회사 이름도 Silicon으로 그린 Graphics라는 뜻의 Silicon Graphics인 것처럼, 3D 컴퓨터 그래픽에 끼친 영향이 대단합니다. 지금이야는 PC에서 3D Max나 마야 등으로 3D 그래픽 작업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시 PC는 여러모로 성능이 후달려서 3D 그래픽 작업은 어림도 없었고, 그런 작업 한다 하면 대다수가 SGI 장비였습니다. 3D 그래픽 분야의 공헌으로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게임 관심 많으신 분들이면 좀 들어봤을 OpenGL의 고향이 바로 SGI입니다. 이건 리눅스나 오픈소스에 관심 많은 분들 정도가 알겠지만 XFS라는 파일 시스템의 고향도 SGI죠. 그리고 MIPS라는 CPU Architecture의 고향도 바로 이 Silicon Graphics입니다(3D 그래픽에 필요한 고성능 CPU도 직접 만든 것이죠). 저 대학교 다닐 때 컴퓨터 아키텍쳐 과목 교재가 'Computer Organization and Design: The Hardware/Software Interface'란 책이었는데 그 책이 설명하는 CPU가 MIPS인 게 생각도 납니다. 책 저자가 MIPS architecture 탄생에 일조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나저나 전 2판으로 배웠는데, 이 책, 벌써 4판까지 나왔군요).


그런데 SGI는 왜 망했을까요?

PC 성능의 향상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예전에 데스크탑 컴퓨터의 쟝르에는, 지금도 IBM이나 HP에서 한 두 모델 선을 보이긴 합니다만, 지금은 사라졌다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이란 쟝르가 있었습니다. 80년대 ~ 90년대 초반까지 PC의 성능은 3D 그래픽이나 과학 기술 계산을 한 후 이를 그래프로 보여준다던지 하는 작업 등을 감당하기에는 성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OS도 DOS가 일반적이었으니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하는 GUI나 멀티태스킹은 꿈도 못 꾸죠. 따라서 당시 3D 그래픽, CAD, 계산 시뮬레이션 등을 할 수 있는 책상에 올라가는, 멀티태스킹과 GUI 때문에 제작사가 공급하는 UNIX와 X 윈도를 탑재하는 컴퓨터 쟝르가 따로 있었고 이게 바로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이죠. 그리고 이런 부분에 강점을 보인 회사가 바로 SGI, 아폴로, 썬이었습니다(그래픽 관련 장비는 SGI가 꽉 잡았고 가격이 싼 덕에 썬 장비는 학교에 많이 팔았습니다).

그런데 인텔 CPU 성능이 좋아지고, OS도 윈도우 NT(최초의 윈도우 NT인 3.1 버전은 93년에 나왔습니다. 당시 꿈의 CPU인 펜티엄 정도에서나 돌아서 박사 과정 학생이 돌리던 NT 신기하듯 보던 게 생각나네요)가 나오며, 오픈소스 라이선스인 GPL 2를 따르는 리눅스 및 XFree86이란 X 윈도 시스템까지 등장하자(94년인가요, PC에서 UNIX랑 X 윈도 함 써 보겠다고, 친구와 함께 당시 유행하던 슬랙웨어 리눅스를 담은, 지금은 구경도 못하는 3.5인치 디스크 30여 장을 비닐 봉지에 담아 와서 486 PC에 설치해 보겠다고 낑낑댄 생각이 납니다. 커널 버전이 0.96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에서만 가능하던 작업이 PC에서도 가능해졌습니다. PC 시장이 훨씬 크다 보니, 이 큰 시장을 노리고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에서만 돌아가던 각종 애플리케이션들도 속속 윈도우 NT용으로 포팅이 되었죠. DOS에서는 돌려보겠단 말조차 민망한 OpenGL을 윈도우 NT에도 탑재하고, 어랍쇼, 아예 ID소프트 같은 곳은 OpenGL로 게임도 만들기 시작합니다. 소비자들은 값이 우라지게 비싸고 한 번 사면 그 회사에 종속되다시피하는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을 구매하는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결국 아폴로는 HP가 사 버렸고 소니는 썬에게서 기술 지원 받아 만들던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 사업을 접었으며 썬과 SGI는 워크스테이션을 포기하고 기업용 UNIX 서버 머신으로 무게 중심을 옮깁니다. 그러나 SGI는 기업용 UNIX 서버 머신 시장에도 안착하지 못했습니다. 3D 그래픽도 엄청나게 공략이 힘든 분야긴 합니다만, 전혀 다른 세계인 기업용 대형 서버 머신 시장에 통하기 쉽지는 않은 법. 책상 위에 올라가는 제품이 주력이었다가 정말 별 놈의 환경, 별 놈의 요구 사항이 난무하고, 별별 시스템과 협업해야 하면서, 시스템 안정성이 나빠 내려앉으면 손해액이 억 단위인 동네 일의 복잡도는, 그들에게는 전혀 알 수 없는 또다른 세계의 복잡함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서버 바닥엔 무시무시한 IBM과 HP가 버티고 앉았는 동네기도 하고요. 썬은 닷컴 버블과 기업 컴퓨팅 환경에서 자바가 뜨면서, 아무래도 자바의 원작자가 만든 서버와 OS가 자바 구동이 잘 될 거라는 믿음 덕에 서버 시장에서 잘 나갔지만(HP나 IBM보다 싸기도 했고, Solaris라는 썬의 UNIX가 훌륭하기도 합니다) SGI는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UNIX 서버 시장에서도 빛 못 보고, 다시 '우리 장기는 역시 3D 그래픽으로 단련된 계산 위주의 컴퓨팅'이라며 수퍼 컴퓨터로 유명한 크레이도 인수하고(결과적으로 이는 삽질이었습니다), 서버 치고는 싼 맛에 쓰는 x86 서버 시장에도 손 대 보지만(틀린 판단은 아닙니다. IBM이나 HP도 x86 서버를 주력 제품군으로 팔 정도입니다. 썬조차도 전임 CEO였던 스콧 맥닐리 시절부터 MS랑 대립각을 세워 온 터라 '윈도우 NT 쓰는 x86 서버는 못 팔겠다'고 끝까지 버티다 결국 팔기 시작했지요) 별 재미 못 보다(하지만 x86 서버 시장은 고부가가치라기보다 물량/가격 싸움이고,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다 보니 경쟁자도 많죠), SGI의 이름을 점점 들을 일이 없어지더니 급기야 2009/4/1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기사 요새는 썬도 IBM이 인수를 하네 마네 하고 있는 판이니...

SGI의 소멸 소식은 Adobe의 Macromedia 인수, Compaq의 DEC 인수, HP의 Compaq 인수만큼이나 충격적이면서도, 몰락하는 귀족의 쓸쓸한 말로를 보는 것 같아 약간 씁쓸하기도 하고, 역시 적자생존은 진리이며 적응하는 놈이 장땡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소식이었습니다.

(덧)

다른 동네보다 훨씬 격렬한 경쟁이 벌어지는 IT 바닥에서, 20세기도 아닌 19세기(1896년)에 생겨서, 망하긴 고사하고 지금도 세계 최강의 역량을 자랑하며 툭하면 다른 회사를 널름널름 인수하는 IBM은 정말 괴물입니다(물론 중간에 한 번 휘청했다 루 거스너가 살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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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하얀 말